만년필이 간첩 증거로…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연행됐다

강동삼 기자
입력 2026 03 18 10:46
수정 2026 03 18 13:04
제주 간첩조작 38건·90명 확인… “일상적 교류가 범죄로 둔갑”
재심 청구 55명 중 49명 무죄… 제주도, 명예회복 지원 본격화
# 1968년 ‘만년필 간첩조작 사건’은 일본에서 농업기술을 배우던 김모씨가 1967년 5~6월 일본의 친척들로부터 양복 중고 1벌(당시 5000원 상당)과 만년필 3개를 받은 것이 발단이 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모씨가 친척에게 받은 만년필이 수리 과정에서 북한 관련 ‘천리마’ ‘조선 청진’ 문구가 발견되며 시작됐다. 김씨는 수사 과정에서 고문을 당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만년필을 나눠 가진 동생들도 함께 처벌됐다. 이들은 재심을 통해 2019년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 1975년 ‘의대 간첩단조작 사건’은 유신체제하에서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이다. 강모씨 등 학생 3명은 영장 없이 연행됐다. 특히 강씨는 약 38~50일에 걸쳐 구금된 상태에서 잠을 재우지 않는 방식,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극심한 가혹행위를 당했다. 반복적으로 자술서를 강요받았고 내용이 수사관들의 시나리오와 다르면 다시 작성하도록 강요당했다. 이후 재판에서 주범으로 지목된 강모씨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감형을 거쳐 1988년 가석방됐으며, 이 사건은 ‘11·22 사건’으로도 불린다.
1960~1980년대 국가 공안기관에 의해 자행된 제주 출신 간첩조작 사건이 대규모로 확인됐다. 피해자 상당수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당시 수사와 재판 과정의 위법성과 인권침해 실태가 다시 주목되고 있다.
제주도는 ‘제주특별자치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라 2022년부터 4년간 진행한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를 마무리하고, 그 결과를 담은 종합보고서를 정리·공개한다고 18일 밝혔다.
제주도는 이 실태조사에서 1960년대부터 1987년까지 발생한 사건 가운데 제주 출신이 연루된 사례 38건, 피해자 90명을 공식 확인했다.
위의 사례처럼 1968년 ‘만년필 간첩조작’이 대표적 사건이다.
간첩조작사건이 제주에서 집중된 배경에는 지역적 특성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 사례 다수는 제주4·3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재일제주인과의 일상적 교류가 1960~80년대 공안기관 수사 과정에서 간첩 혐의의 빌미가 된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제주 4·3 사건 이후 생계와 강제동원 등으로 일본으로 이주한 제주도민이 많았고, 1971년 기준 재일제주인은 약 8만 6000명에 달했다. 가족·친척 간의 방문과 선물, 경제적 지원 등 일상적 교류가 당시 공안기관 수사 과정에서 간첩 접촉의 근거로 활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결과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영장 없는 연행과 장기 구금, 가혹행위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는 옷을 모두 벗긴채 매달아 놓는 행위, 수면 박탈,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신체적·정신적 폭력이 동반됐으며, 수사기관이 작성한 시나리오에 맞춰 자술서를 반복 작성하도록 강요받은 사례도 다수 확인됐다.
전체 피해자 90명 가운데 75명은 기소돼 재판을 받았고, 12명은 불법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은 뒤 석방됐다.
재심 결과는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 재심을 청구한 55명 가운데 현재까지 49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일부 사건은 여전히 재심이 진행 중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비극인 셈이다.
피해자 연령은 20~40대가 81.1%로 가장 많았고, 직업별로는 노동자와 농어업 종사자가 61.1%를 차지했다. 학생 피해자 7명은 모두 재일동포 유학생으로, 사건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들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집에서 평범한 어느날 갑작스럽게 연행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모씨는 직장에서 근무중에, 김모씨는 집에서 자고 있다가 밤중에 들이닥쳐서 연행됐다.
제주도는 이번 조사를 토대로 피해자 명예회복과 지원 정책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이번 조사는 2021년 제정된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인권증진 및 지원 조례’를 근거로 4년에 걸쳐 진행됐으며, 면담과 문헌 조사, 전문가 자문 등을 통해 사건 전반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와 유족 지원을 위한 제주도 차원의 통합 상담창구 마련이 시급하다”며 “상담창구는 개별 지원을 넘어 국가폭력 피해의 구조적 실태를 집적, 분석하는 공적기록 관리의 역할까지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인영 도 특별자치행정국장은 “민간 연구기관 주도의 조사를 통해 제주 간첩조작사건 피해를 최초로 종합 정리했다”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인권증진 지원 방안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간첩조작사건 피해자인 강광보씨가 운영하던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관이자 쉼터인 ‘수상한 집’은 내부 사정으로 인해 임시 휴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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