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은 죄인을 심문할 때 정말 주리를 틀라고 했을까

유용하 기자
입력 2026 03 15 13:00
수정 2026 03 15 13:00
“친국(親鞠)할 터이니 준비토록 하라.” “○○에 대한 국문(鞠問)은 어찌 되었는가.”
사극이나 역사 관련 영화를 보면 자주 들을 수 있는 대사다. 친국은 조선시대 임금이 중죄인을 직접 신문하는 제도이며, 국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임금의 명을 받아 담당 관원이 중죄인에게 형장을 가하는 심문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친국이나 국문에서 죄인에게 주리를 틀거나 인두로 지지는 등의 형벌을 가하며 진술받아내는 장면도 볼 수 있다. 현대적 법 관념으로 보면 ‘과연 저랬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조선시대 법제사를 연구하는 정진혁 박사는 최근 펴낸 학술서 ‘조선 후기 형정개혁과 추국’(지식산업사)에서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의 중앙집권적 통치구조에서 의금부, 형조 중심의 추국, 자백과 결안(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의 형 확정 절차)을 중시한 형사제도 등 조선시대 형정을 이야기한다.
정 박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경제적 변동으로 갈등이 심해지고 백성들의 의식이 성장하는 때에 초점을 맞춰 조선 후기 사법개혁 추진 배경과 진행 과정을 살펴봤다. 이를 위해 ‘추안급국안’ 전체에 실린 300년 동안의 형사 정보와 개인 정보를 모두 추출해 계량화했다. 추안급국안은 조선 후기 중죄인의 조사·판결서를 모은 책으로 1601년 선조 34년부터 1892년 고종 29년까지 300년 정도의 각종 사건을 다뤘다. 책의 분량은 일정치 않지만 인조, 숙종, 영조, 순조 때의 것이 많다.
저자는 조선 후기 형사사법 개혁 단계를 숙종 대의 ‘문제 대두기’, 영조 대의 ‘개혁 모색기’, 정조 대의 ‘개혁 정립기’로 나눠 단계별로 국왕의 법의식과 신료들의 형정론을 교차시켜 보여준다. 숙종 대에는 경신·기사·갑술환국, 영조 대에는 이인좌의 난, 정조 대에는 정조 시해 미수 사건으로 알려진 정유역변이 형정 운영의 변곡점이 됐다.
학술서여서 딱딱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형정 개혁을 둘러싸고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는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권력이 국왕에 집중되던 숙종 때도 민간의 여론이 형사제도에 영향을 미친 장면은 눈길을 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 폐비 반대 상소를 주도했던 박태보에게 법외 악형인 압슬형(무릎을 짓이기는 형벌)과 낙형(쇠붙이로 지지는 형벌)을 가해 결국 물고(고문치사)시킨 사건은 부정적 여론을 일으켜 이후 숙종이 사망할 때까지 악형이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이는 국왕의 형사법 남용을 관료와 민간 여론이 제약한 대표적 사례라고 정 박사는 설명했다.
압슬형이나 낙형 같은 악형은 자백 유도 효과는 높았지만 동시에 물고율이 높아지는 부작용도 상승했다. 이 때문에 영조 대 이후에는 법외 악형은 완전히 소멸되는 상황이었고, 법적 규정에 의한 고신으로 전환됐다. 이에 대해 정 박사는 ‘국왕이 직접 수사하고 피의자가 직접 자백한다’는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 ‘하위 사법 기관이 수사하고 국가가 증거를 종합해 판결한다’는 효율적 측면으로 전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트윅, 무단 전채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