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라의 브랜드 앤 아트] 왕세자비의 가방, 디올
입력 2026 09 14 21:22
수정 2026 09 14 21:22
이우환이 재해석한 레이디 디올(디올 레이디 아트 열 번째 에디션, 2025). 디올 제공
1987년 영국 최초의 에이즈 전용 병동 개원식에 참석해 장갑 없이 환자의 손을 잡은 뒤로, 다이애나는 왕실의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이 됐다. 사람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는 언행만큼이나 그의 패션 감각 역시 사랑했다.
남편의 외도 고백이 방송되던 1994년 저녁, 그는 어깨를 드러낸 검정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복수의 드레스’라 불린 옷이다. 1981년 약혼 시절의 빨간 양 떼 스웨터는 어떤가. 흰 양들 사이에 검은 양 한 마리, 왕실의 이방인이라는 농담이었다.
그리고 가방 하나가 있다. 1995년 가을 파리, 그랑팔레의 세잔 전시 개막에 온 다이애나에게 프랑스 대통령 부인 베르나데트 시라크가 검정 가죽 가방을 건넸다. 격자무늬 누빔은 디올이 1947년 첫 컬렉션에서 손님 의자로 썼던 나폴레옹 3세 시대 등나무 의자에서 왔다.
다이애나가 이 가방을 즐겨 들자 디올은 이듬해 이름을 바꿨다. 레이디 디올. 브랜드 이름 앞에 실존 인물의 호칭이 붙었다.
2016년 디올은 이 가방을 미술로 옮기는 ‘디올 레이디 아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매해 연말 열 명 안팎의 작가를 초대해 각자 레이디 디올을 다시 디자인하게 하고, 실물로 제작해 한 종에 백 개씩만 판다. 지난해까지 총 아흔아홉 명의 작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한국 작가도 이름을 올렸다. 김민정은 향불로 태운 한지의 결을 퍼와 비즈로 옮겼고, 우국원은 회화 속 풍경을 자수와 비즈로 옮겼다. 원로 작가 이우환은 지난해 열 번째 에디션에 참여했다.
사실 창립자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옷보다 그림이 먼저인 사람이었다. 1928년 파리에 화랑을 열어 막스 에른스트와 만 레이를 걸었고, 대공황에 화랑이 무너진 뒤에야 옷을 그렸다.
화랑 주인이 걸던 그림이 한 세기 뒤 그의 가방 위에 있다. 다이애나가 들었던 것은 가방이 아니라 캔버스였던 셈이다.
이세라 아츠인유 대표·작가·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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