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자부심이 독이었다”...정재헌 SKT CEO, ‘조 단위’ 투자로 인프라 대수술[MWC26]

민나리 기자
입력 2026 03 02 08:00
수정 2026 03 02 08:00
“1등이라는 자부심이 우리에겐 독이었습니다. 지난해 겪은 해킹 사고는 단순한 기술적 실수가 아니라, 우리가 근본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였습니다.”
1일(현지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MWC 2026 기자간담회. 정재헌 SK텔레콤 CEO는 취임 123일의 소회를 ‘뼈아픈 반성’으로 시작했다. 그는 40년간의 성공에 안주했던 과거를 인정하며 “송두리째 바뀌지 않으면 도태가 아니라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밝혔다. SK텔레콤의 뿌리부터 다시 세우겠다는 선언이었다.
위기 돌파의 해법으로 정 CEO가 꺼내 든 카드는 ‘AI 중심 재설계’다. 그는 통신사의 심장부인 통합전산시스템과 네트워크 인프라를 AI 기반으로 전면 개편하는 조 단위 투자를 예고했다. “지금 시스템 개편을 미루는 것은 비용을 아끼는 게 아니라, 더 큰 미래 비용을 떠안는 일”이라며 “지금이 대전환을 실행할 생존의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다. 이사회 승인이 필요한 대규모 투자이지만, 더는 늦출 수 없다는 판단이다.
가장 큰 변화는 기존 레거시 전산망을 ‘AI 비즈니스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고객이 정해진 요금제에 맞추던 구조에서 벗어나, AI가 사용 패턴을 실시간 분석해 최적의 요금과 서비스를 제안하는 체계다. 고객이 혜택을 찾아다니는 대신, 시스템이 먼저 이해하고 제안하는 초개인화 환경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전략적 승부수는 ‘1기가와트(GW) 규모 초거대 AI 데이터센터(DC) 벨트’ 구축이다. 1GW는 원전 1기와 맞먹는 발전 용량으로, 약 100만가구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전력 규모다. 정 CEO는 아마존웹서비스(AWS)와 협력 중인 울산 인프라에 이어, 오픈AI와 추진 중인 서남권 데이터센터를 핵심 거점으로 제시했다. 이를 통해 한국을 글로벌 자본이 모이는 아시아 최대 AI 허브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리스크 관리 원칙도 분명히 했다. ‘선(先)수요 후(後)구축’ 전략이다. 그는 “울산 사업은 이미 아마존과 15년 장기 계약을 체결해 공실 우려가 없다”며 “서남권 역시 글로벌 파트너 수요를 기반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단순 공간 임대를 넘어 그룹사의 에너지 솔루션과 가상화 기술을 결합한 ‘풀스택 AI 데이터센터’를 지향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AI 모델 전략은 규모 확장과 산업 특화라는 두 축으로 전개된다. 이번 MWC에서 공개된 519B(5190억개) 파라미터 규모의 독자 모델 ‘A.X K1’을 연내 1000B(1조개)급 이상으로 고도화해 글로벌 상위권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다. 특히 보안 문제로 범용 AI 도입이 어려운 제조 현장을 겨냥해 SK하이닉스와 ‘제조 특화 AI’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 CEO는 “공정 효율을 0.1%만 높여도 경제적 파급 효과는 막대하다”고 전했다.
미래 네트워크는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통해 준비한다. 기지국을 AI 연산 거점으로 전환하는 ‘AI-RAN(무선접속망)’ 기술을 통해 자율주행차와 로봇 등 피지컬 AI가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환경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는 “6G 시대에는 통신망 자체가 지능형 인프라로 진화할 것”이라며 “2029년 전후 6G 표준 완성을 기점으로 본격 상용화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직 문화의 AI 전환(AX)도 본격화한다. 이날 공개된 홍보 영상은 SK텔레콤 브랜드팀이 열흘 만에 AI로 제작한 결과물이다. 정 CEO는 이를 실질적인 AX 성과로 소개하며 “일하는 방식이 이미 AI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임직원이 직접 AI 에이전트를 개발·활용하는 ‘1인 1 AI’ 환경을 구축해, AI를 관념이 아닌 실무 도구로 정착시키겠다는 방침이다.
발표의 마지막 키워드는 ‘법고창신(法顧創新)’이었다. 정 CEO는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한다”는 뜻의 ‘법고창신’을 재해석해 ‘옛 고(古)’ 대신 ‘돌볼 고(顧)’를 사용했다. 기본과 원칙을 나침반 삼아 고객을 깊이 살피고,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으로 새로운 AI 시대를 열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는 “기업의 궁극적 목표는 영속”이라며 “기본에 충실하되,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으로 혁신을 이어가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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