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자가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입니다. 시대도 세대도 바뀌었지만, 취재수첩에 묻은 꼬깃한 손때는 그대롭니다. 기사에 실리지 않은 취재수첩 뒷장을 공개합니다.
유관순 열사 수형 기록 카드.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3·1절을 앞두고 마음이 편치 않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소셜미디어(SNS)에 유관순 열사를 조롱하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영상이 잇따라 올라오며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독립을 외치던 17세 소녀의 얼굴이 2026년의 알고리즘을 만나 엉뚱한 방향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28일 틱톡에는 유관순 열사를 소재로 한 영상 여러 편이 확인됩니다. 영상 속 설정은 차마 웃고 넘기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열사가 방귀를 뀌고 “시원하다”고 말하는 장면, 일장기를 향해 애정을 표현하는 장면, 심지어 상반신은 열사·하반신은 로켓인 기계장치가 등장해 “유관순 방구로켓”을 외치며 우주로 솟구치는 장면까지 담겼습니다.
영상은 오픈AI의 영상 생성 모델 ‘소라’(Sora)로 제작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AI가 참고한 이미지는 3·1운동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을 당시 촬영된 수의 차림 사진입니다. 기술은 중립적일지 몰라도, 쓰임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유관순 열사를 희화화한 AI 생성 영상. 틱톡 캡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틱톡에는 김구 선생을 조롱하는 게시물도 올라왔습니다. 반면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꼽히는 이완용의 사진에는 “와, 포스 봐라” 같은 찬양성 문구가 덧붙었습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지난 27일 SNS에 “한 누리꾼이 제보해줬다. 삼일절을 앞두고 이런 상황이 벌어져 정말 안타깝다”고 적었습니다.
시민들 반응은 싸늘합니다. “유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한참 넘었다”는 지적이 잇따랐습니다. 영상을 보고 공분을 느꼈다는 30대 직장인 김모씨는 “역사를 지킨 인물들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AI로 조롱 영상을 만드는 모습을 보니, 기술 발전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고 밝혔습니다.
틱톡에 올라온 김구 조롱과 이완용 찬양 영상 모습. 서경덕 교수 SNS 캡처
사실 그동안 AI는 ‘역사 복원’의 조력자로 박수를 받아왔습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 인물에게 색을 입히고, 정지된 얼굴에 미소를 되돌려주며, 교과서 밖 위인을 교실 안으로 불러왔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틈을 좁히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평소 틱톡을 즐겨 본다는 20대 이모씨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AI로 패러디한 영상은 많이 봤지만, 독립운동가를 소재로 한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고 전했습니다.
법은 어디까지 손을 뻗을 수 있을까요.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사자명예훼손죄는 ‘허위 사실 적시’가 있어야 처벌이 가능하지만, 최근 AI 영상처럼 원색적인 조롱이나 구체성이 떨어지는 욕설은 요건을 충족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모욕죄 역시 보호 대상을 ‘생존하는 인물’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사자 모욕죄를 신설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됐지만, 아직 계류 중입니다. 틱톡 측은 “커뮤니티 가이드라인 위반 콘텐츠를 상시 검수해 필요한 조처를 하고 있다”며 관련 영상을 삭제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지금으로선 플랫폼의 자율 규제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의 얼굴을 다루는 일에는 속도보다 신중함이 필요해 보입니다. 3·1절을 앞둔 지금,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재미있는 콘텐츠’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뜻일지도 모릅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AI가 기억을 확장하는 도구가 될지, 기억을 흐리는 장치가 될지는 결국 우리 사회의 선택에 달려 있다”면서 “사회적으로 피해를 초래하는 AI 영상에 대해서는 이를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