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러두기] 거기에 삿됨이 하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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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여권이 필요한 여행을 작심했다. 특별히 여행 자체에 의심이 있어 그러했던 건 아니었다. 가방 속에 여권보다는 주민등록증을 수시로 확인해야 했던 긴긴 병원살이 속에 하루살이야말로 시차로부터 가장 먼 개체임을 알게도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떠난 사이 그가 떠나면 어쩌지. 비행기에서 누군가의 부음을 듣는 상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면 나는 어떤 이유로든 떠날 수 없는 사람임이 맞았던 것이다.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했던 이진명 시인의 시 구절을 무릎 꿇고 섬겨왔던 사람이라면, 친애하는 부사 ‘훌쩍’을 콧물이든 눈물이든 단숨에 들이마시는 소리라 우선하여 받들어 모시고 살아왔던 사람이라면, 올 기일은 그래서 무슨 요일일까 누군가의 부재 앞에 슴슴한 표정으로 달력을 확인하는 여유까지 부리게 된 사람이라면, 여권 재발급을 위해 사진관 카메라 앞에 앉아 어색한 입꼬리를 씰룩대고 있는 나는 오늘에서야 떠날 수 있는 사람임이 맞는 것이다.

가만, 서두가 왜 이렇게 긴가 하면 왜 그 심리 있지 않은가, 어딘가 멀리 떠나려고 할 때 오히려 제 가까이 털퍼덕 주저앉게 되는 그 심사 말이다. 집 먼지가 하루아침에 쌓인 것도 아닌데 왜 나는 트렁크를 꺼내오기 전에 총채부터 찾는가. 사놓고 켜켜이 쌓아 두기만 한 책이 어제오늘의 일만도 아닌데 왜 나는 하필 800쪽이 넘는 벽돌책을 펼쳐서는 이 완독 끝에 여행이 시작이라는 이상한 결심으로 그간의 게으른 독서를 반성하는가. 사랑했다 사랑한다 사랑할 것이다 말했고 말하고 말할 사람들에게 그간의 무심함을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서야 반성을 해서는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 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수십 자루씩 칼로 연필부터 깎아대는가.

족히 하나이면 될 것을 다분히 여럿이어서가 아닌가 에둘러 보니 온통 짐이라는 무게다. 하찮은 것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간직하려는 인간의 심리적 복합체를 몰리에르의 ‘수전노’ 속 주인공 아르빠공의 이름을 따 아르빠공 콤플렉스라 바슐라르가 말한 바 있거늘 여행자가 될 때면 나는 늘 아르빠공이 되는 듯하다. 버려야 가벼워지고 놓아야 가뿐해지는데 그 당연함을 잘 알면서도 나는 왜 여직도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는가.

내 일이 아니라지만 네팔 대홍수의 현장을 입 벌린 채 보면서 내 일처럼 울고, 내 일이 아니라지만 친구의 여섯 살짜리 어린 딸이 한 줌 재가 되는 걸 아파하면서 내 일처럼 울고, 그렇게 멀리라는 그 거리의 가까움을 동시에 배우면서 울다 보니 트렁크를 눕혀 지퍼를 열기까지가 근 하루다. 다시 생각해 봐도 짐을 싼다는 건 거기에 삿됨이 하나 없는 일 같다.

정해진 위탁수하물은 23㎏, 이 제한이 있어 비유컨대 우리는 저마다 가진 짐의 무게를 간간 재며 제 살아옴의 여기까지를 가늠해 보기도 하는 걸 테다. 아슬아슬 검색대를 통과하는 트렁크다. 내 생의 선발대는 언제나 그렇듯 내가 아닌 내 가방인 것이다.

김민정 시인·난다출판사 대표

김민정 시인·난다출판사 대표
김민정 시인·난다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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