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비극이 비추는 오늘…끝을 향해가는 연극 ‘안트로폴리스’ 연작

기사 소리로 듣기
다시듣기
재난과 전쟁, 신념의 충돌…신화는 지금의 인간을 묻는다
국립극단 ‘안트로폴리스’ 연작 중 3부 ‘오이디푸스’.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 ‘안트로폴리스’ 연작 중 3부 ‘오이디푸스’. 국립극단 제공


독일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59)의 5부작 ‘안트로폴리스’는 고대 그리스 테베 왕가의 신화를 무대에 올리지만,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지금 여기의 인간 사회다. 인간의 시대를 뜻하는 ‘안트로포첸(Anthropozän)’과 도시국가를 뜻하는 ‘폴리스(Polis)’를 합친 말이다. 2023년 독일 함부르크 도이체스 샤우슈필하우스에서 초연된 이 연작을 국립극단이 지난해부터 차례로 공연하고 있다.

지난 24일 개막한 3부 ‘오이디푸스’ 공연에 맞춰 30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과 강량원·서지혜·정영두 연출가, 임일진 무대미술가가 작품에 대해 가진 질문은 한곳으로 모였다. 신화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을 되묻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안트로폴리스’ 연작은 지난해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윤한솔 연출)와 2부 ‘라이오스’(김수정 연출)로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올해는 3부 ‘오이디푸스’(강량원 연출·10월 18일까지)에 이어 4부 ‘이오카스테’(서지혜 연출·10월 28일~11월 21일), 5부 ‘안티고네/에필로그’(정영두 연출·12월 2~26일)로 이어진다.

박 단장은 연작을 올린 이유를 ‘현존과 좌표’에서 찾았다. 박 단장은 “연극은 인간을 위해,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이라면서 인간의 현존에 사회적·경제적 환경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좌표’를 붙였다. ‘안트로폴리스’도 그 질문의 일환으로 “고전과 신화에는 인간의 뿌리, 역사의 뿌리, 폭력의 뿌리가 있다”면서 “우리가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에 관객이 몰리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30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립극단 ‘안트로폴리스’ 연작의 3~5부를 설명하는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사진 오른쪽부터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오이디푸스’ 연출 강량원, ‘이오카스테’ 연출 서지혜, ‘안티고네/에필로그’ 연출 정영두, 임일진 무대미술가. 국립극단 제공
30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립극단 ‘안트로폴리스’ 연작의 3~5부를 설명하는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사진 오른쪽부터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오이디푸스’ 연출 강량원, ‘이오카스테’ 연출 서지혜, ‘안티고네/에필로그’ 연출 정영두, 임일진 무대미술가. 국립극단 제공


무대에 오르는 세 편의 연출가가 저마다 붙든 질문도 결국 ‘지금의 인간’이었다. 강 연출은 소포클레스(기원전 496년경~기원전 406년)의 ‘오이디푸스 왕’이 던지는 질문, 곧 도시를 덮친 재난을 누가 해결할 것인가를 거꾸로 뒤집었다. 그는 “그리스 시대에는 현명하고 완전한 인간이 재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지금은 바로 그런 생각이 현재의 재난을 초래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인간에게 소외되거나 인간 바깥으로 밀려난 비인간의 관점과 몸을 통해 지금의 인간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함부르크 공연에서 40명의 코러스를 둔 자리에 개·염소·독수리·금강석 같은 비인간 존재를 두었다. 쉼멜페니히가 원작 희곡에 부록으로 붙인 ‘암흑의 집’에 등장하는 존재들이다. 오이디푸스 역시 장애를 갖고 이주민으로서 차별을 견뎌 온 소수자로 다시 그렸다. 강 연출은 “수치와 상처로 가득 찬 몸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 몸이 잘 보이도록 무대를 거의 없애고 소품을 걷어낸 뒤 빛으로 가득 채웠다”고 덧붙였다.

4부 ‘이오카스테’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오카스테를 되살린다. 쉼멜페니히는 아이스킬로스의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수’와 에우리피데스 ‘페니키아 여인들’을 바탕으로 왕위를 놓고 전쟁을 벌이려는 두 아들을 중재하는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세웠다. 서 연출은 “다섯 편을 읽는 내내 반복되는 피와 폭력의 비극을 말리는 사람이 앞에서부터 한 명도 없었다”면서 “작가가 지혜로운 이오카스테를 되살린 건 이쯤에서 멈춰 서서 협상 테이블에 앉아 지금 문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자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떠올렸다.

강량원 “비인간의 몸으로 들여다 본 인간”
서지혜 “문명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시간”
이 작품이 다루는 시간은 짧은 휴전 동안 평화 협상이 시작돼 결렬되기까지가 전부다.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며 협상은 조금씩 나아가다 끝내 깨지고, 전쟁이 시작되며 막이 내린다. 이오카스테는 폭력의 악순환을 멈추려는 유일한 중재자이자 협상의 진전과 결렬이 곧 성공과 실패로 맞닿는 인물이다.

서 연출은 “피와 폭력에서 발생한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지금의 우리에게도 고대와 다름없는 비극이 계속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로 읽었다”면서 지금 세계 뉴스에서 보이는 장면들로 치환시켜 무대에 올렸다. 에테오클레스의 선전포고를 기자들 앞의 대국민 선언으로, 성 밖 폴리네이케스의 외침을 기자회견 형식의 입장 발표로, 전쟁의 공포에 떠는 여인들의 장면을 시민들의 시위로 바꿨다.

4부가 던지는 이성적인 판단이 실패할 때 맞이하게 되는 파국은 ‘안티고네’로 넘어간다. 쉼멜페니히는 ‘안트로폴리스’ 작가의 말에서 이오카스테와 안티고네를 “수동적인 역할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인물이라면서 “절대적 권력은 없지만 둘 다 도덕적 용기를 보여준다”고 전했다.

국립극단의 ‘안트로폴리스’ 연작 중 4부 ‘이오카스테’를 상징하는 이미지. 4부는 왕위를 놓고 전쟁을 벌이려는 두 아들을 중재하는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그린다.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의 ‘안트로폴리스’ 연작 중 4부 ‘이오카스테’를 상징하는 이미지. 4부는 왕위를 놓고 전쟁을 벌이려는 두 아들을 중재하는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그린다. 국립극단 제공


정 연출이 맡은 5부 ‘안티고네/에필로그’로 연작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현대무용 안무가와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해온 정 연출에게 이번 작품은 국내에선 첫 연극 연출이다. 국내에서 연극을 연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독일이 아닌 지금의 대한민국, 나아가 보편적인 세계 상황에서 인간이 문명을 대하는 자세, 자연을 대하는 자세를 작품 안에 어떻게 녹여낼지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의 신념과 다른 사람의 신념이 부딪힐 때 그것을 풀어가는 인간의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흑과 백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쉽게 나눌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이 그런 존재인가를 들여다보고 있다”면서 “앞의 네 작품을 연결하면서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종결지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연작은 독특하게 ‘프롤로그’로 테베의 시작을 짚었고, 맨 끝에 ‘에필로그’를 붙였다. 정 연출은 “역시 인간의 문명에 대한 이야기”라며 “그 자체로 완성도를 담아내겠다”고 했다.

세 연출가의 말을 겹쳐 보면 연작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 드러난다. 지난해의 1·2부가 테베의 기원과 신의 광기, 오이디푸스 이전의 역사를 펼쳤다면, 올해의 세 편은 인간이 스스로 불러온 재난과 전쟁, 국가와 양심의 충돌을 다룬다. 쉼멜페니히 역시 앞서 독일 매체 인터뷰에서 ‘이오카스테’에 이르면 더는 신이나 신탁이 끼어들지 않고 형제가 서로에게 전쟁을 선포한다고 했다. 후반부 세 편이야말로 지금의 인간상을 가장 또렷하게 비추는 셈이다.

다섯 편의 무대를 모두 맡은 임 무대미술가의 말은 그 자체로 관람 포인트다. 그는 “시작과 끝이 선명한 5부작이라 자칫 같은 공간을 조금씩 바꿔 가는 미니시리즈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서 “연출가들의 주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색깔이 워낙 달라 하나의 공간에 묶어 두는 건 말이 안 된다. 각 연출의 주제를 최대한 살리면서 통일성을 어떻게 가져갈지가 가장 큰 숙제”라고 말했다.

임일진 “연출 색깔 살리되 공통 상징 활용”
정영두 “관객이 자연스레 느낄 종결 고민”
일종의 촬영장처럼 만든 ‘디오니소스’와 커다란 계단을 세운 ‘라이오스’는 무대 위를 가득 채워 시각적 요소를 강화했다. ‘오이디푸스’는 무대를 비운 미니멀리즘 성격이 강하다. 각기 다른 무대를 보여준 임 무대미술가가 다섯 편을 잇는 끈으로 남겨 둔 건 LED 구조물 ‘빌보드’와 컨테이너다.

임 미술가는 “상징이라고까지 하기엔 조심스럽지만, 다섯 연출가의 방향에 모두 부합하는 공통분모를 찾아 최소한만 남겨 둔 채 각 작품의 개성을 살린다”면서 “각 편이 따로 떼어 놓아도 선명한 색깔을 갖고, 이어 붙였을 때는 큰 덩어리 안에서 연결점이 확실히 보이는 작품이었으면 한다”는 의도를 전했다.

2013년 한태숙 연출의 ‘안티고네’ 무대도 맡았던 그는 “당시 ‘안티고네’가 아고라 광장이나 정치 제도 같은 사회 시스템과 개인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연작은 정치나 인문학보다 제목 그대로 인류학에 맞춰져 있다”고 비교했다.

남은 두 편의 무대에 대해서는 “‘오이디푸스’와는 또 다를 것이다”라며 말을 아꼈다. 대신 관객에게 당부를 남겼다. “테베라는 도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상상하지 않는 게 낫다. 스타일은 내려놓고 각 작품이 향하는 인류학적 문제를 지켜봐 주면 무대를 읽기가 한결 편하다”는 것이다.

배우 전혜진이 열연한 ‘라이오스’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배우 전혜진이 열연한 ‘라이오스’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최여경 선임기자
  • 카카오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네이버블로그 공유하기
  •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 트윅,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내안의 AI 본성 분석 :
UNMASK ]
"기사를 읽는 동안 깨어난 당신의 숨겨진 페르소나를 AI가 스캔합니다."
기사 읽는 습관에 숨겨진 당신의 MBTI는?
기사 반응 MBTI 확인
Q.
기사를 끝까지 읽으셨나요? 이제 AI 퀴즈로 기사의 핵심 내용을 점검해보세요.
기사를 다 읽으셨나요? AI 퀴즈로 핵심 점검!
안트로폴리스 연작의 구성은 몇 부작인가?
연예의 참견
더보기
여기 이슈
더보기
갓생 살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