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아주 긴 안부
황수정 기자
입력 2026 10 26 00:07
수정 2026 10 26 00:51
큰마음 먹고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한다. 첫아이의 배냇손톱이 든 편지봉투가 나온다. 배냇저고리에 얌전히 싸인 봉투를 여는데 아이가 세상에 나온 그 새벽의 샛별 하나가 또렷이 뜬다.
낯선 기쁨과 낯선 두려움이 범벅이었던 새벽. 잠이 오지 않아 창 너머 하늘을 오래 올려다 보았지. 뺨 붉었던 내 얼굴을 나는 그려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이가 숫자를 배우던 공책도 나온다. 아인슈타인이 될지 몰라. 공책 갈피에서 내 젊은 치기가 비어져 나온다. 별걸 다 모았네, 나는 나에게 웃어 준다.
색바랜 엽서에는 옛집의 주소들. 이삿짐을 싸면서 나는 잊었는데 주소들은 오종종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낡은 상자와 낡은 봉투와 낡은 엽서들을 펼쳐 놓고 그만 길을 잃었다. 기억들이 우르르 말처럼 달려오고. 어제 일도 잘 잊어버리는 내가 어느 먼 모퉁이의 나를 잊지도 않고 찾아서 데려온다. 어쩌면 나는 나를 잊지 않으려고 낡아 가는 것들을 곁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
먼 그곳의 내가 나한테 말을 걸어온다. 잘 지냈느냐고,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냐고, 별일 없을 거라고. 멀리서 자꾸 안부를 묻고 있다.
황수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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